천연석화의 신비
天然石畵의 神秘 |
海印 金長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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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아름답게 보느냐 무관심하느냐는 각자의 마음 속에 있음으로 해서 석면에 나타난 그림을 보는 견해가 천차만별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동°서양이 다르고 수석인과 비수석인이 다르고 수석인끼리도 보는 시각이 다르다
같은 시각으로 볼지라도 느낌은 다르다. 그것은 삶의 체험과 환경과 知的 경험이 축적된 각자의 고유한 감성으로 각각 다르게 느끼기 때문이다. 동양인은 선녀를 그릴 때 옷자락을 날리며 구름을 타고 하강한다. 그러나 서양인이 천사를 그릴 때는 날개를 단다. 날 수 있는 이유를 붙이는 것이다. 같은 사물을 두고 아동이 그린 것과 화가가 그린 것이 다른 것처럼 돌은 있는 그대로인데 십년 전에 봤을 때와 지금 볼 때가 전혀 달라 보이는 것은 안목의 깊이와 관심도가 그만큼 달라졌기 때문이다.
간단한 문자(一心水石) 또는 해, 달, 꽃, 나무, 새, 사람, 동물같은 일상적으로 낯익은 이미지를 바탕으로 공감대를 형성해 오면서 사군자(매, 란, 국, 죽)나 십장생(물, 불로초, 돌, 구름, 해, 학, 산, 거북, 사슴, 소나무)과 같은 운치있는 그림들을 돌에서 찾게 되었고 수석인들의 끝없는 美的 추구는 산과 하늘을 경계 짓는 능선 한 줄만 구불퉁 그으져 있어도 광대무변의 공간을 알고 댓잎(竹葉) 한 개만 보여도 천지의 계절을 알 수 있을 것같은 문양의 세계에까지 접어들게 된다. 좋은 문양석을 선택함에 있어서는 필요 불가 결한 조건이 수반된다. 거슬림이 없는 돌의 외형선과 신뢰감을 주는 치밀한 질감, 극색의 대비, 호색의 조화, 적절한 여백, 짜임새 있는 구도, 힘의 안배가 잘 되어있고 옛스럽고 시정이 넘치는 문양석을 택해야 누가 보아도 아름답게 느낀다.
까만 돌에 둥근 점이 노랗게 찍혀 있으면 월석으로 보자고 했고, 청석에 흰 선으로 두 번 그리면 갈매기로 본다. 먹돌에 흰 점이 점점이 박히면 눈 내리는 풍경이고 푸른 돌에 빨간 원이 크게 찍히면 해라고 한다. 고양이 비슷하면 호랑이로 보고 뱀 비슷한데 갈기가 있으면 용으로 보고, 사람의 모습이면 성스런 분으로 보는 것은 수석의 격을 높이고자 하는 의도이다. 처음 수석을 대할 때는 누구든지 거치는 과정이지만 짧은 기간 쉽게 수석에 매료되고 혼자만의 판단으로 자가당착에 빠져서 퍼석한 돌을 놓고 여기가 꼬리이고 이것은 눈이라고 입에 거품을 물고 우기는 경우를 가끔 본다.
수석은 우기는 것이 아닌데 전체를 보지 못하는 안목이 안타까울 때가 있다. 그러니까 자칫 소홀하기 쉬운 형, 질, 색, 선 , 면 등 기본 요건을 항상 염두에 두고 문양석을 찾아야 만이 취양이 다른 수석인도 공감할 수 있는 타당성이 있는 돌을 취하게 되고 오랜 시간을 두고 보면 볼수록 정감이 가는 돌이 결국 좋은 돌로써 남게 되겠지만 수석인 상호간의 감상과 이해의 폭을 줄이고 보는 즉시 고개를 끄덕이고 공감을 가질 수 있는 길은 동호인들과 산지에서 찾는 연습과 감상훈련을 통해서 쌓고 관계 서적이나 전시회 또는 수석회 활동으로 교류를 가짐으로써만이 가능하다.
기왕이면 좋은 선배를 만나서 사상과 철학 그리고 인품까지 배우고 같은 방향에서 함께 생각한다면 돌을 보는 것(image)에서 느끼는 것(意味)으로 또 사유(思惟)의 세계로 다가서게 되고 돌에 대한 적극적인 의미부여를 함으로써 자연과 인간이 하나임을 인식하고 거기에 몰입함으로써 돌의 미학에 접근하고 다다르게 된다고 본다. 때로는 오랜 경륜으로 인해서 모든 구체성을 떨쳐버리고 점 하나 선 하나에서 심오한 감정을 이끌어 내고 얼핏 보면 몽돌같은 것을 아끼고 완상하는 것을 볼 때면 오히려 너그럽게 포용하는 인품이 돋보이게 된다. 무언가 비의(秘意)가 숨어 있을 듯하여 참뜻을 엿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세상의 미학을 다 본 사람이 없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삶이 다할 때까지 항상 배우는 자세로 겸허할 필요가 있다. 문양의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 다 알 수는 없지만 우리가 찾고 즐길 수 있는 좋은 돌들이 海江山川 곳곳에서 애써 찾는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명산, 명품, 명작, 명화, 명곡, 명기들이 오래된 것에서 名字가 붙여지는 것은 환경과 시대를 뛰어넘어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전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名石이란 칭호는 후세의 수석인들이 붙여줄 것들을 남겨 두고 좋은 수석을 찾아서 후대에 볼거리를 넘겨 주는 것이 우리 수석인들의 사명이라고 본다. 오랜 세월을 갈고 닦은 보석같은 안목을 그냥 놀리면 혹시 직무유기(職務遺棄)가 안될런지.
나온 돋울무늬(隆起紋), 찍은무늬(刺突紋), 가는선무늬(短斜線紋), 꼬부랑무늬 등이 얼기설기 섞여서 부적(符籍)이나 갑골문자(甲骨文字) 혹은 천부인(天符印), 암각화(岩刻畵), 종정금석문자(鐘鼎金石文字)와 같이 쉽게 풀이할 수 없는 그림들이 주술적이거나 설화적인 신비스러움으로 다가올 수도 있고 원초적(原初的) 문양으로는 엇갈림, 묶음, 끊어짐, 갈라짐, 나부낌, 맴돔, 출렁임, 꺽임, 스침, 삐뚬, 흩어짐, 쏟아짐, 날음, 꼬임, 비틀림, 휘임, 솟음, 마주침, 번짐, 나눔 등으로 화법 구성의 시원적(始原的)인 면면을 살펴볼 수가 있다.
또는 무수한 자연계의 현상인 극광, 월륜, 신기루, 유성, 은하수, 번갯불, 금환일식, 계기일식, 월식, 블랙홀, 신성폭발이나 후두둑 떨어지는 빗살,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 흐르는 물살같은 것들을 돌 그림에서 찾아보고 관념산수, 추상산수, 심상산수, 인물화, 화조도, 초충도, 민화같은 것이나 기교를 거부한 일획일도(一劃一圖)의 문인화라든가 선의 경지를 표현한 선화(禪畵)같은 소재를 돌 속에 끌여 들여 상징적으로 대입시켜서 쾌감을 얻고 자연과의 친화성에 근접할 수도 있다. 그렇게 많은 문양들을 다 수용하면 안되는 돌이 어디 있겠느냐고 하겠지만 지천에 널린 돌 중에서 잘 생긴 산수경석이 어렵듯이 문양석 역시 기품이 있는 것은 어렵고 귀하다.
문양석은 특히 면이 매끄러운데 海石에서 찾기가 용이한 데 海石은 해석(解釋)하기에 따라 전혀 다른 감상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가령 기암괴석이 입석으로 우뚝 서 있고 노인네가 꾸부정하게 손을 모으고 있는 문양이라면 다만 늙은이가 돌 앞에서 무언가 하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표면적인 美를 보는 것과 엄청난 세월의 무게로 신령스럽게 버티고 있는 괴석의 굳건한 자태 앞에 돌어르신네 하고 禮를 갖추는 미원장의 배석도(拜石圖)를 떠올리는 내면적인 美를 느끼는 것과는 다소 의식의 차이가 있다.
줄기 하나에 꽃 한 송이만 있을 때 잎이 없어서 하고 버리는 쪽과 일경일화(一莖一花)의 멋을 소중히 생각하는 쪽도 있는 것이다. 또 위 아래가 다른 색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위에는 선명한 달이 박혀있고 아래에도 달이 떠 있다. 심사숙고 끝에 달이 두 개라서 하고 포기하는 경우와 보는 순간 물 속에 빠진 이백의 월을 생각하고 애지중지 챙기는 견해의 차이를 볼 수도 있다. 문양석은 대체적으로 좌대에 연출하는 것이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같은 돌일지라도 상하좌우 놓은 위치와 거리에 따라서 또는 좌대의 재료와 솜씨에 의해서 달라 보이기도 하고 빛의 밝기와 비추이는 각도에 따라서 전혀 새로운 분위기를 얻을 수도 있다. 이처럼 돌 선택의 어려움과 연출의 중요성을 감지하면 고갈되었던 산지가 새로운 산지로 떠오를 수도 있는 것이다.
다양하게 분포된 산지의 특성에 따라 간결하게 도안화된 그림이 있는가 하면 세필로 섬세하게 그린 듯 격조 높은 그림도 있고 때로는 상큼한 수채화의 맛과 현란한 유화의 즐거움도 얻을 수가 있다. 안개가 자욱히 흐르는 새벽의 숲, 달을 가르는 밤새의 나래짓, 학과 소나무, 뜬구름과 나그네, 정자와 계류, 수평선과 파도, 야생초와 바위, 들과 억새풀 이렇듯 상호 보완적인 문양들을 열심히 찾다 보면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은 항존한다. 문양석과 일반 예술품과는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문양석은 절대로 복제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모든 예술품은 픽션(fiction)이고 수석은 논픽션(nonfiction)이다. 예술은 속임수로 진실을 호소하지만 수석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진리를 일깨워 주고 있다.
동양화도 서양화도 아닌 자연석화(自然石畵)의 신비를 접하면 우리는 태고의 흔적을 더듬고 우주의 본질에 대한 끝없는 의문에 부딪히게 되며 교감을 가지게 된다. 새가 하늘과 땅 사이, 신과 인간 사이를 연결짓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원하는 곳을 어디든지 날을 수 있는 자유로움의 동경 때문은 아닐런지. 그래서 수석은 감상자의 자유로운 해석과 연상으로 인해 더욱 즐거울 수가 있는가 보다.
비우고 또 비워도 다 비울 수가 없고 채우고 또 채워도 다 채울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완벽하게 만족할 수 있는 수석이 어디 있으랴 마는 약간 부족하면 애정으로 감싸고 조금 모자란 듯하면 관용으로 끌어안을 때 비로소 꾸밈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돌멋을 느끼고 순진무구(純眞無垢)한 절대 자유의 미를 만끽하게 될 것이다. 과거는 항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고 했다. 과거인 채 정체되어 묵묵한 돌 주위를 오늘도 살펴보고 어루만지고 맴돌며 서성이면서 이렇게 가만히 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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