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閑溪) 2012. 1. 10. 16:19

 

심우도(尋牛圖)

                                                                                                                

                                                                             海印  金 長 玉 

 

 

지난 1985년 초 화창한 날에 대건수석회(신부님들의 수석 모임)의 바닷돌 전시회가

부산 카톨릭 센타에서 열렸던 적이 있었다.

 송구스럽게도 필자가 연출을 부탁받은 바 있었는데,

돌은 차치하고 특히 눈길을 끌었던 것은 벽면에 걸린 연화도(蓮花圖)였고,

또한 승방에서 차를 나누고 있는 스님들의 자적(自適)한 모습이 사진 속에

들어 있었던 것을 보고 묘한 자극을 받았던 것이 생각난다.

 

 

 

 

 

 

 

 

 



그 이듬해 해박한 이론과 남다른 미의식으로 해석 세계에 몰입하고 있는

 검소한 B목사님의 석실을 두드린 필자는 또 한번 놀랐다.

 교회 안에 있는 목사님의 안방에는 사유석을 비롯한 각양 각색의 돌들이 정연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저 돌은 어떻게 보셨습니까?" 라고 넌지시 물었더니

 "달마지요"하고 서슴없이 대답한다.

 

 

 

 

 

 

 

 

 


"동방박사로 보시는 것이..."하고 아부성 발언을 했더니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달마도 존경합니다.

두 분 다 성자니까요"하고 빙그레 웃는다.

"꼭 물어보고 싶었던 게 있었는데,

목사님께서는 가슴에 손을 얹고 진솔하게 대답해 주세요.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하늘나라에 살고 계십니까?"하고 물었다.

 

 

 

 

 


 "...없다고 생각하고 함부로 살다가 저 세상에서 만나게 되면 낭패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있다고 믿고 사는 것이 현명한 일이지요"하는 우문현답을 듣고,

계면쩍어 하던 나의 눈에 문양석 한 점이 들어왔고

어떤 강렬한 이미지가 떠 올랐다.

돌아서 가는 사람은 성자처럼 보였고 뒤 따라가는 군중들은 제자 같았다.

그래서 「쿠오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고

석명을 지어서 권해 드렸더니 어린애처럼 기뻐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렇듯 그들은 돌을 통해서 종교의 분파를 초월하고 있었다.

그 동안 수석생활을 해 오면서 절실하게 느꼈던 것은 詩는 있는데

시를 이해하는 사람은 없고 수석인은 많은데 애석인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수석정신을 이해하고 언행일치를 추구하며,

자신을 추스리고, 숭고한 사상과 이념 그리고 깨어있는 정신으로 남을

감화시킬 수 있는 그러한 수석인상이 너무 적다는 말이다.

 

 

 

 

 

 

 

 

 

 

 

 

비록 흙탕물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그 혼탁함에 물들지 않는 부용화(芙蓉花)처럼 척박한 세상 인심에도 불구하고

 오니불염(汚泥不染)의 정신을 심어가고 있는

 진정한 애석인 몇몇이 경향각지를 기둥처럼 버티고 있음으로 해서

그래도 수석생활은 할 만한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으며

 독일의 악성(樂聖) 베토벤,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에 이어서

머지 않아 이 땅에서도 석성(石聖)이 출현하게 될 것을 간절히 고대한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보니 청명한 하늘에 구름 한 점 흘러가고 있다.

서서히 흩어지는 조각 구름이 오늘따라 웬지 무상하게만 느껴진다.

우연히 알게 된 심우도의 이야기를 해볼까 하니 좀 쑥스럽다.

예순을 바라보는 지금에 와서야 심우도(尋牛圖)의 깊은 뜻을 알아 차렸으니

 나 같이 한심한 사람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게다.

심우도는 숲 속으로 달아난 소를 찾아 산속을 헤매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해서

열폭의 그림으로 수행의 과정을 입문에서 깨달음에 이르기 까지의

구도자적 행적을 비유한 것이다.

 

 

 

 

 

 

 

 

 

1. 심우(尋牛) : 잃어 버린 소를 찾으러 산으로 들어간다.
2. 격적(見跡) : 헤메이다가 소의 발자국을 찾게 되고,
3. 견우(見牛) : 발자취를 따라가서 소를 발견하게 된다.
4. 득우(得牛) : 고삐를 잡고 실랑이를 하다가,
5. 목우(牧牛) : 풀을 먹이며 한가롭게 쉰다.
6. 기우귀가(騎牛歸家) : 소를 타고 피리를 불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7. 망우존인(忘牛存人) : 소는 간데 온데 없고 소를 찾았다는 생각마저 잊고,
8. 인우구망(人牛俱忘) : 자신까지도 잊어 비린 듯 사람도 소도 없이 안개 낀 산골짜기만 고요하게 보일 뿐,
9. 반본환원(返本還源) : 모든 것을 털어 버린 무념무상의 근본에 자리한 반야(般若)의

 모습을 보게 된다.
10. 입전수수 : 속세로 돌아와 깨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대충 이러한 내용의 그림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주제가 소였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고

그래서 나름대로 생각을 해 보았다. 내가 보았던 소의 눈은 참으로 순하고 선했다.

 탐욕도 원망의 빛도 보이지 않았고, 순종의 눈빛은 착하기만 했다.

도살장에서 단 한번 주인의 몰이를 거부하는 본능과 한 방울의 눈물 그리고 짤막한 울음.

그 뿐이다.

노력을 봉사하고 죽어서는 푸짐한 먹거리와 가죽까지 미연없이 내어주고 간다.

 

 

 

 

 

 

 

 

 


 
물론 태어난다는 것은 반드시 떠난다는 것과 같이,

가진다는 것은 버리게 된다는 전제 조건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남김없이 모든 것을 다 주고 간다는 것, 그것은 바로 불성을 뜻하는 것일지라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풀이가 잘못 되었더라도 양해를 구하면서 다시 한번 간추려 보면,

 

 

 

 

 

 

 


 

 


1. 때 묻지 않고 깨끗했던 잃어 버린 본래의 마음을 찾으러 떠나면서,
2. 자신이 걸어 온 지난 자취를 되돌아 보게 된다.
3. 더렵혀지고 훼손된 양심을 회복시키고,
4. 스스로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된다.
5. 정신을 가다듬고 수행을 시작하면서,
6. 깨달음의 공간인 마음자리를 정하게 된다.
7. 수행을 향한 목적조차도 잊어 버리고,
8. 모든 것이 空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9. 자연은 있는 그대로임을 깨닫게 되고,
10.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속세의 저자 거리로 다시 들어가게 된다는 것.

 

 

 

 

 

 

 

 



그것은 결국 해탈(解脫)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깨우쳤다 한들 변한 것이 무엇인가?

세상의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가 본질인 것을...   

이 세상은 구해서 얻어지는 것도 없고 잃는 것도 없는 공의 세계라는 것을

심우도는 말해 주고 있는 것이며,

시심마(是甚魔)라는 영원히 풀 수 없는 선문을 던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해탈의 경지에 이른 바닷돌,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은은한 색과 조용한 선의 흐름은 명상의 세계로 나를 이끌어 간다.

 

 

 

 

 

 

 

 

 



가장 원시적(原始的)이면서, 가장 궁극적(窮極的)인 의미를 내포한 바닷돌, 그 불가사의한 신비의 실상 앞에서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다만 사색에 잠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