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閑溪) 2019. 6. 22. 23:26

개개비





 

초록 물감 물러터진 팔월 연밭 한낮이

 

개개비 붉은 입에 개개비비 저무는데

 

빛 낡은 기억 한 장이 노랗게 자지러지는데

 

 

바람도 돌아앉은 눈 아린 연잎 위를

 

온통 지치도록 네 지문이 떠오른다

 

오래 전 잊었던 얼굴 소나기처럼 지나간다

-박지현 개개비 개개비비전문, 개화(201524)


 

키욧, 키욧, 쯔끼, 쯔끼, , , , , 씨이, 키욧, 키욧, 치치하고 되풀이하여 지저귀는 개개비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울음이라는 시어를 쓰지 않고도 작품 전체에 개개비의 울음소리가 퍼진다.

팔월 연밭 한낮이그것도 초록 물감 물러터진팔월 연밭이 개개비 붉은 입에저물고 있다. 손에 잡힐 듯한 회화적이고 서정적인 표현이 자그마한 개개비로 인해 가능한 것이다. ‘노랗게 자지러지는개개비의 울음소리는 빛 낡은 기억 한 장으로 떠오르고, 그 울음소리는 지문이 되고, 급기야 오래 전 잊었던 얼굴이 연밭을 소나기처럼 지나간다시인은 치밀한 구조 안에 개개비의 울음소리가 진해질수록 그 그리움도 진해지도록 장치해 두었다. 그리고 그 그리움의 끝에 소나기라는 시어를 배치하여 감정을 절정으로 끌어 올린다. 강렬한 느낌이 소나기란 시어 하나에 펄펄 살아 있다.

초록, 붉은, 노란의 색감은 한낮개개비에 집중되어 이 작품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바람도 돌아앉은 눈 아린 연잎 위개개비는 어쩌면 오래 전 잊었던 얼굴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얼굴을 간직하고 싶은 화자 자신일 것이다.

개개비는 우리나라 전역에 도래하는 흔한 여름철새이자 통과철새이다. 갈대나 물가 초지에서 쉽게 볼 수 있었으나 습초지, 물가의 초지, 유휴지가 개간되어 서식지가 거의 사라져 감에 따라, 요즈음은 극히 제한되고 한정된 곳에 도래, 번식한다고 한다. 개개비의 울음소리를 오래도록 듣고 싶다. 그 울음소리에 소나기처럼 지나가는 오래 전 잊었던 얼굴을 보고 싶다.


 

생태적 사유는 우주의 만물이 그들 나름대로의 존재 이유와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모두가 평등하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만물의 독자적 가치를 인정하고 비록 인간이라 할지라도 절대적인 중심이 될 수는 없다는 사고가 바탕이 된다.

우리 주위에 있는 작은 생명과 자연에 귀 기울일 때 그들은 우리 곁에 오래도록 머물 것이다. 그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들의 말을 받아 적을 때 그래서 그들과 아픔을 함께 할 때 개개비 붉은 입에 계절은 가고 또 올 것이며 우리도 시조도 함께 익어갈 것이다.


사진:2019년6월22일 주남저수지연밭에서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