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돌이 아름다운 이유
해인 김 장옥
자연을 대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자연의 기(氣)를 받기 때문이다.
도심지를 하루 종일 걸으면 심신이 녹초가 되는데,
돌밭에서는 종일토록 탐석을 해도 가벼운 피로가 상쾌하게 올 뿐
깊은 숙면에 들 수가 있는 것은
자연의 에너지를 계속 받기 때문이다.
기는 흐르며 돌고 또 움직이는 에너지 차원의 한 실체이다.
파도가 주는 역동의 힘으로 돌을 이리 저리 움직여서
가장 많은 에너지를 축적하고 있는 것이
바닷돌이다.
그래서인지 해석을 보고 만지면 기가 전해져 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이번에는 바닷돌의 크기에 대해서 소견을 말해볼까 한다.
표준이라는 것은 사물의 정도에 따라서 달리 책정되어진다.
강변에는 메주덩이만큼한 돌이 많으니까 15~45cm 사이의 크기를 표준석으로 정하고
그 이하는 소품석이라고 한다.
또한 가구점에는 8~12자짜리의 크기를 표준으로 하니까
탁자나 의자 정도는 소품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다이아몬드는 200mg에 지나지 않는 1캐럿이 표준이고
5캐럿만 되어도 초대형이 된다.
그러니까 해안의 자갈밭에는 주먹만큼한 돌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소위 소품석이라고 부르고 있는 3~15cm 사이의 바닷돌을 해석의 표준석으로
기준을 잡는 것이 합당할 것이라는 것이 나의 소견이다.
조각공원에는 대형작품이 설치되고
정원에는 정원석이 어울리듯이 거실과 안방에 있는 돌의 크기가 또 다르다.
돌이 작아질수록 친밀감이 생기는 것이다.
큰 돌은 양괴감과 박력있는 무게감으로 해서 선호의 대상이 되지만
작은 돌은 작은 돌대로 당차게 기를 응축시킨 것같은
강렬함 때문에 애호의 대상이 된다.
큰돌과 작은 돌은 가장 잘 보이는 거리와 위치만 다를 뿐이고
심안렌즈의 성능만 다를 뿐이다.
고로 큰 돌과 작은 돌의 비율은
감상 시간이나 감흥의 폭, 애완의 정도가 1:1이 된다.
작은 돌의 절대적인 조건은 작으면 작을수록 일당백(一當百)이 될 정도로 뛰어나야 하고
깊은 심미 능력을 꼭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작은 돌만 고집하는 것도 아니고 현미경 수석을 권유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관조자의 심상 세계 속에서 작은 돌의 아름다움을 받아 들이고
또 마음으로 키워보기와 줄여보기로 조율할 수 있는
그 누구도 닮을 수 없는 독자적인 함축의 세계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배고팠던 시절의 잔영 때문에 크고 많은 것을 원했던
시기는 가고 작지만 핵과 같은 힘을 가진 것이 필요한 시대이다.
이제는 작아도 질적으로 우수한 것을 택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으므로 해서 큰 돌에
대한 관념을 잠시 벗어나 작은 돌에 대한 미감을 더 자유롭게 진화시켜야 한다.
작고 어린 것은 다 귀엽고 사랑스럽지 않던가.
사람들은 소중한 것을 감추려고 한다.
그래서인지 작은 보석은 장롱 깊이 감추어지고
작은 돌은 가슴 속 깊숙이 들어 앉힌다.
수석인이라면, 좋은 집에 큰 석실을 누구나 다 갖고 싶어한다.
억대의 값을 치루고 구입한 수석들을 어마어마한 석실에 가득 채우고
석우님들을 초빙해서 양주잔을 기울이며 도도하게 취해가는 맛이야말로
그 얼마나 즐겁겠는가. 빈 방도 비우면 넓어진다.
머리맡 작은 공간도 좋고 다락방 석실도 좋다.
꼬옥 쥐고 온 아기 속살 같은 바닷돌 한 점 소중히 연출해 놓으면
자신만의 문화공간이 생기는 것이다.
부산의 어느 석인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탐석한
엄지 손가락만한 세 개의 사유석을 삼성현이라고 명명하고
일곱 개의 자태석에서 죽림의 일곱 현인을,
그리고
열 여섯 개의 인물석에서 십륙나한을 보며
어느덧 성인과 현인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해강산수(海江山水)와 별미를 맛보기 위해서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진정한 여행자는 진리를 탐색하고자 길을 나선다.
대개의 수석인들은 배낭을 메고 탐석을 가서는 욕심을 가득 담고 돌아온다.
하지만 일부 바닷돌을 사랑하는 이들은 배낭 대신에 호주머니를 택했고 돌을 뒤집으며
시(詩)를 줍는다.
밤이 오면 파도에 부서지는 달빛을 건지고 소주잔을 기울이며 낭만을 마신다.
서울의 어떤 분도 가끔씩 동해 남부의 해변 햇빛마을로 탐석을 오는데
추풍령을 지나면 전화를 건다. "난데, 거의 다 왔어."하고.
마음이 지척이면 천리도 지척이라더니
마음은 이미 돌밭에 와 있는 것이다.
돌아갈 땐 기껏해야 바둑알 만한 색깔 좋은 돌 몇 개 달랑 주머니에 넣고 가서는
맑은 물에 담궈놓고 만지작거린다.
입만 벙긋하면 다 아는 정통 수석인의 모습은 이미 아니다.
수반도 버리고 좌대도 버리고 그림도 지우고 형태도 지우고
고요함과 허허로움의 세계에 물입하는 구도자의 모습처럼
그렇게 자연과 허심탄회하게 동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청빈낙도의 수석생활을 그 어디에다 비할 수가 있을까.
작아도 결코 작지 않은 크나큰 돌사람 실천의 철학을 보면서
작은 돌을 아끼는 그런 지혜를 택하고 양과 부피를 탐하는 무지를 버리는
훗날의 내 모습도 미리 떠올려 본다.
해석은 이론을 전제로 삼지 않는 느낌의 돌이다.
바닷돌 형태는 원시적 에로티시즘(eroticism)에 근접하고,
바닷돌 문양은 원초적 무늬에로의 회귀를 뜻한다.
논리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해석을 접함으로써 논리를 성립시키기 때문이다.
강돌이건 바닷돌이건간에 가치로운 돌은
원래 산지에서부터 찾기가 힘들고 아주 귀하다.
흔해빠지고 숱한 돌 중에서도 닭이 천 마리면 봉황이
한 마리쯤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찾다 보면
그림인 듯 아닌 듯한 평범한 무늬들 속에서 언뜻
비범한 명화로 떠올라 수석인의 감정세포를 찡하게
건드려줄 그런 돌을 품에 안을 수가 있을 것이다.
작은 돌이 왜 그렇게 귀중한 건지 한번 더 짚어보자.
가령 훌륭한 화가를 모셔다가 조막만한 돌 표면에 극세필로
산수화나 추상화를 그리게 한 후 다시 조각가에게
그 그림을 음각으로 깊게 새겨줄 것을 부탁한다.
그 다음 자연색 돌 가루로 새긴 자리를
다시 메꾸고 매끈하게 다듬어서 작품을 완성시켰다고 했을 때
물론 색과 선의 융합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리는 만무하지만
과연 얼마만큼의 작품료를 지불해야 할까?
왜 그런 주문을 해보았는가 하면 바닷돌 문양은
그냥 돌 표면에 칠해진 것이 아니고
각기 다른 석질들이 버무려져서 속속들이
색깔과 그림이 깊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절제할수록 표현은 강해진다.
작아도 옹골찬 바닷돌의 감칠맛은 절제미에서 나오고
맛은 멋으로, 멋은 곧 풍류로 이어지게 된다.
한 점의 해석을 완성하기 위해 파도는 지금도 철썩이고 있다.
해조음에 귀를 세우리라.
가장 선적(禪的)이고,
가장 정적(靜的)인
선(線)을 위하여
무수한 변화와 크기를 포기하고 닳고
또 작아져서 온몸으로
전하는 바닷돌의
언어가 들릴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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