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석/수석이야기(자료)

맥락

한계(閑溪) 2012. 1. 10. 17:39

맥락(脈絡)

                                                                              海印  金 長 玉

 

 

 

「사람은 사물의 진정한 의미에 접근함에 따라 자신도 모르게 단순성(單純性)에 도달하는 것이다」
                                                                                                                          -브랑쿠사



달( )은 달처럼 해( )는 해처럼, 새( )는 새같이 말( )은 말같이 물( )은 물이 흘러가듯 산( )이 솟아 있는 듯이 보이는 그대로 그려진 고대상형문자(古代象形文字)며,

거북의 「甲」이나 짐승의 「骨」에 각인(刻印)된 갑골문자(甲骨文字)를 보면

 사실적인 그림에 가깝다.

글과 그림은 그 뿌리가 같음을 분명하게 알 수가 있고,

그림에서 파생된 글자의 발달은 전서(篆書)에서 예서(隸書)로 해서

또 해서(楷書)로 변하고 행서(行書)까지 발전하게 되며

 드디어는 불필요한 것을 빼 버리고 간략한 필치의 곡선만으로

이루어진 초서(草書)가 완성되어,

글자는 인류 문명에 크나큰 기여를 하게 된다.

초서는 어렵고 난해하지만 고도로 발달한 글자이다.

 

 

 

 

 

 

 

 지표에 돌출된 산석은 비바람에 씻기워져서 찌든 때를 벗기며

세월의 이끼를 입혀 간다.

강으로 굴러 떨어진 서릿발 같은 돌은 점차 흐르는 물에

 그 기상을 누그러뜨리고,

 상류에서 하류로 굴러 갈수록 강돌은 점점 더 부드러워 지면서

 젊잖게 어른스러워 진다.

 

 

 

 

 

해안으로 모여든 돌은 파도를 만나면서 격렬한 시련을 겪게 된다.

 버리고 없애면서 깍이우고 닳아지면서 파도의 죽비(竹扉)를 수 없이 두들겨 맞는다.

 파도는 쉼을 용서치 않는다.

시종(始終)을 절주(節奏)하라고 한순간 한순간 사정없이 내려친다.

 오로지 완성을 향한 끝없는 정진을 위하여...

 

 

 

 

 

                                                   글자의 발달과 돌의 변천은 이처럼 자연의 이치를 말해주고 있고,

 초서와 해석은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초서는 언제든지 구체적인 상형문자로 환원될 수 있는 골격을 갖추고 있으며,

 바닷돌은 사실적인 그 모든 것을 떨어버리고 형태의 정수(精粹)만이 남아서 언제든지

산돌 강돌 뿐만 아니라 모든 형태의 이미지를 끌어 낼 수 있는

구성의 비밀을 지니고 있다.

 

 

 

 

 

 

 바닷돌은 쉽고 편하게 대할 수도 있지만 하면 할수록 더 어렵다.

 해석(海石)은 해석(解釋)의 범위가 워낙 넓고 깊어서 끝이 보이질 않는다.

초서의 어려움을 평생 동안 탐구하고 터득하려 하는 학자들과 같이

쉽고도 어려운 난이(難易)한 바닷돌의 매력에 사로잡혀 탐미(耽美)를 향한

수석인의 열정은 조건반사(條件反射)처럼

 더욱 더 불타오르게 되는 것이다.

 

 

 

 

 

 

 

 



균열이 나 있는 거북의 등을 닮았다고 해서 귀갑석(龜甲石)이라고

 부르는 돌은 부산의 일광과 용호동에서 산출되었고,

남해, 울산, 구룡포, 낙월도 등 여러 곳에 분포되어 있다.

 주로 땅속에서 캐낸 토중석이라 털어내고 손질해서 보통은 거북좌대를 짜서

감상을 하게 되는대,

 해안에서 자연적으로 수마된 귀갑석을 귀하게 만날 수도 있다.

 오래 산다고 해서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장생에 뜻을 두고 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극심한 가뭄에 거부등처럼 쩍쩍 갈라진 논 바닥을 보며

 한 줄기 빗방울을 기다리는 농부의 안타까운 마음을 보는 것만 같아서

안쓰럽기도 하다.

때로는 도자기 형태의 귀갑석이 깊게 패이지 않고 실금으로 균열을 이루어

 마치 유약이 자잘하게 갈라 터진 것처럼 관요(官窯)에서 나온 품위있고

 고풍스러운 도자기의 맛을 느끼게도 한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은 돌과 짝사랑뿐이다.

그토록 오랜 날들을 돌에 매달린 것도 아마

내가 돌을 짝사랑했기 때문이리라.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경륜이 쌓이는 반면에 순수는 잃어간다.

닳고 구를수록 순수로 돌아가는

바닷돌의 고고(孤高)함은 우리들에게

시사(示唆)하는 바가 크다 아니할 수 없다.

 

극과 극이 서로 통한다고 하더니 어린이들의 순수한 낙서와 치기가 보이지 않는 훌륭한 화가의 소박한 그림은 통하는 점이 있다.

어쩌면 어린이는 세파에 물들지 않았고 달인은 세속을 벗어났기 때문은 아닐까?

 

 

 

 

 

 

 

 

 

 

"아찌야"가 보고 싶어서 꿈속에서 울었다는 어느 동화 속의 아이처럼,

전복과 소라보다는 돌을 더 좋아하게 된 어떤 해녀가 물질을 하고 있다.

물 속에서 숨이 턱에 찰 때까지 감상을 한단다.

 돌이 보고 싶어서 비 오는 날에도 자맥질을 한다.

나올 때 보니까 낙지 한 마리에 돌이 여섯 개 합이 일곱이었다.

 "아주머니! 비님이 오시는 데도 작업을 하시는군요?" 하고 물었다.

해녀가 씽긋 웃으며 대답하면서 간다.

 "물 속에는 비가 오지 않는걸요"

 

 

 

 

 

 

 



넓적넓적 했더라면 방축도 쌓고 담돌도 하고,

 굵직하고 울퉁불퉁 했더라면 수반이나 정원 한쪽 귀퉁이라도

놓여질텐데 작고 매끈거려서 이끼도 잘 붙지 않고 석부작에도

 쓸모없는 돌 같지도 않고 지지리도 못생긴(?) 몽돌(夢乭).

수행의 모습으로 천년을 닦아온 그 꿈같은 돌이 이제 해석인의 사랑을 듬뿍 받고, 마당과 거실을 생략하고 안방을 차지했다.

 이 얼마나 당당한 아름다움인가.

슬쩍 흘려 보고 지나쳐 버릴 수도 있는 두리뭉실한 바닷돌의

외형적 물성(物性)은 사실 별 것이 아니다.

그러나

 관심을 갖고 유심히 살펴보고 깊이있게 파고들면

내성(內性)에서 울려 나오는 진정한 의미와 우리가 추구하는

 돌의 미학이 오롯이 담겨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묵(墨)은 먹물을 낳고, 현(絃)은 음(音)을 낳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술로 승화한다.

 돌은 수석을 낳고,

 수석은 정신을 낳으며,

그리고

 수석인은 자연에 몰입하는 구도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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