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석/수석이야기(자료)

비익조와 연리지

한계(閑溪) 2012. 1. 10. 17:44

 

비익조와 연리지

                                                                                海印  金 長 玉

 

 

해마다 봄 가을이면 연례행사처럼 각종 전시회가 열리고 그중에서도

 수석전시회가 가장 풍성하고 활발하게 전개된다.

 전시는 항상 새로운 면을 보여주어야 하고 뚜렷한 성격을 제시하는 것이

전시의 목적이다.

 그래서

소장자와 감상자의 교감을 수단으로 전시회를 가지게 되는 것인데,

 현 시대의 애석문화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는 전시장에서 나타나게 되고

수석인을 위해서도 또한 수석에 관심을 가진 일반인들을 위해서도

주제(主題)를 뚜렷하게 설정한 고품격 전시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지역마다 많은 전시가 열리고 있지만 수석계의 이목을 끄는 뛰어난 전시는

 그리 많지 않은 실정이고 보면

 관조자들은 무관심한 상태로 몰아가는 그저 그렇고

그런 무성격의 전시회는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몇 해 전인가 근사한 표지와 양질의 팜플릿이 아닌

 엽서 크기에 화환사절이라는 글귀와 함께 간략한 내용이 담긴 안내문이

검소하게 날아 들었고 도식적인 행사보다는

알찬 내용을 보여 주었던 점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던

 모 전시회의 광경을 떠올려 보면 지금도 눈에 삼삼하게 어리고 흐뭇해진다.

 

 

 

예로부터 우리들의 선조들은 정갈하고 숙연한 자리에는

반드시 깔았던 돗자리가 햇병아리 색깔로 눈을 끌며

풋풋한 왕골냄새를 풍기며 깔려 있었고

 강돌과 바닷돌, 수반석과 좌대석이 적절한 간격으로 배치되었다.

 야생초도 전시 며칠 전에 뽑아다가 급조한 것이 아니라

분에서 해묵어 차분하게 자리잡은 소담한 것들이었다.

 화분은 앞으로 살짝 당겨 놓아서 산과 바위는 멀리 봄으로써 원경이고,

 풀은 가까이 보는 근경이라는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주었다.

또한 차갑고 강한 돌을 감상한 후 경직된 눈의 피로를 초록빛 풀로

부드럽게 풀어주면서 벽에는 고서화나 서각이 수석과 상호 연관성 있는

사의적인 내용을 담아 심심한 벽면공간을 처리하고 있었다.

 

 

 

 전시장이 전체 전시품의 내용을 담는 그릇이라고 볼 때

진열대는 수반이나 지판의 연출 공간이 되고 수반과 지판은

 돌의 위치와 여백을 결정하는 자리가 된다.

 때로는

의욕적인 전시욕 때문에 회원 상호간에 나름의 안목이나 자리 다툼으로

서로의 목소리를 높이다 보면 전체의 균형이 흐트러지고

일렬 횡대로 줄이 서는 불협화음 같은 백화점식 진열을 보게 되어

 보는 이들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들기도 한다.

음계의 고저장단이나 소리의 맑고 탁함이 음악을 창출하듯이 화대와 지판,

추물분과 소품 연출대의 높낮이를 조절함으로써 음악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펼쳐진 전체적인 분위기가,

다른 전시장에서 본 같은 높이의 화대에 올라앉은 비슷비슷한 크기와

형태의 돌들이 한번 고개를 돌리면 시선이 저만큼 지나가 버리는 것과

대조를 이루면서 네 귀퉁이에 입석으로 사주를 세우고,

조금 높은 바닷돌 연출장을 중간중간에 안배함으로써

한 점 한 점 시선을 멈추게 배려를 한 탁월한 연출솜씨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상 음양과 오행,

요철과 양극같이 상생하는 자연의 이치를 생각해 보면

 강돌과 바닷돌과 산돌

그리고

토중석 등을 각기 떼어놓고 현미경을 들이대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수석의 형식을 답습하고 나면 그 형식 또한 벗어나야 한다.

어떠한 틀에 갇힌다는 것은 자유롭지가 못하기 때문이다.

수석은 자유로워야 한다.

 새의 날개처럼 자유롭게 비상하고 시정과 운치를 넘나드는

정신적 쾌락을 구가해야 한다.

우람하고 만고부동한 남성미를 보이는 주름 많은 강돌의 노태수석과

최선의 선으로 최대의 아름다움을 얻어 낼 수 있는 우아한 여성미 같은

 팽팽한 청정해석과의 조화는 예스러움과

현대적 미감을 함께 공유하는 애석인들만의 특권이 아닐 수 없다.

 

 

 

 대부분의 석인들은 개장시간에 맞춰서 먼 거리를 달려온다.

각처에 흩어져 사는 반가운 석우들을 만나 보고 싶기 때문이다.

 한참 북적이다가 전시장을 잰 걸음으로 둘러 본 뒤

 테이프 컷팅이 끝남과 동시에 썰물처럼 쫙 빠져나가 버리는

관람인파를 보게 되는데

 주최측에서도 자존심이 상하고 서운한 일이 되겠지만,

귀한 분들을 초대해 놓고서 정성을 쏟지 않은 전시 내용과

 건성으로 하는 접대로 쉽게 떠나 버리게 만드는 것도

 더욱이 예의가 아니다.

 

 

 

 어떤 선배는 방명록에 정관(靜觀)이라는 흔적을 남겨놓고 찬찬히 둘러본다.

격려하기도 하고 칭찬도 하면서,

가깝게 다가갔다가 뒤로 물러서 보기도 하고 허리를 굽혀 보다가

측면에서 보기도 한다.

수석감상은 소장자가 선택한 돌의 뜻을 짐작하고

그 마음을 느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시 한번 돌아보며 마음의 여유를 보이는 반백의 뒷모습이 수석보다

더욱 아름답고 멋있어 보였다.

단체나 개인적으로도 유일하게 지역갈등도 없고

 향토색도 내지 않으면서 오고 가는 우리 수석인들의 화합이

민족대화합으로 이어질 것을 염원하면서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에 나오는 비익연리를 인용해 본다.

 

 

 

비익조(比翼鳥)는 두 마리의 새가 한 몸이 되어 날개를 가지런히 맞대고

 날아 다닌다는 상상의 새로서

 헤어질 수 없는 남녀관계를 사랑의 상징으로 표현했고,

연리지(連理枝)는 수종이 서로 다른 나무의 가지가 부비고 맞닿아서

 결이 통하고 한 나무가 되는 것인데

성분이 다른 남남으로 만나서 화목하게 살아가는

부부의 정을 화합의 표상으로 삼았다.

 예나 지금이나 사랑과 화합은 인류 공동의 과제로 남아 있지만

이런 문양을 찾으면 버리고 오는 수석인은 아마 없을 게다.

 

 

 

                                                                        자연은 저마다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매화는 맑은 청초함이 있고 산유화는 홀로 외로움이 있다.

 풍란은 향기로워야 하고 야생화는 미풍에 살랑거려야 한다.

경석은 천년 풍우에도 끄떡없는 고고함을 지녀야

 하고 해석은 섬세하게 절제된 형상언어와

 만상의 비의를 품고 있어야 한다.

 

 

 

무릇 이러함에도 탐미생활이란 애정과 관심을 전제로 하게 된다.

폭설 속에서 사경을 해매일 때

그 설경이 아름답게 보일 리가 없고

바위에 부딪쳤을 때 그 돌이 고와 보일 리가 없다.

배고파 허기질 때는 돌보다 음식이 더 탐이 난다.

그래서

 자연미는 원래 있고 없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인 의식으로

고요하게 바라 볼 때만이 생기는 것이다.

 

파도가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해운대를 지나 일광 가는 길목 달맞이 고개에 올라서면

오륙도가 한눈에 들어오고 옥빛 바다가 굼실거리면서

 나같은 문외한도 시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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